뉴질랜드 (New Zealand, '11.03-04)

06. 프란츠 조셉 빙하(Franz Joseph Glacier), 지금 저 앞의 천 년

Abby. 2012. 9. 6. 02:45

[2011.03.23]


프란츠 조셉 빙하는 와나카 호수에서 북쪽으로 세 시간 거리에 있다.

지루할 틈 없이 호수와 산과 바다와 평원이 번갈아 얼굴을 내보이는 아름다운 길이다.








여기서 살면 참 좋겠다.


마당 있는 낮은 집을 하나 얻고, 

아이들은 흙을 밟고 자랄 수 있게, 

나이 들면 집을 캠핑카로 옮겨 우리 둘이 다니면서.


그런데

헨리 데이빗 소로 같은 깊은 성찰을 할 순 없어도 가끔은 혼자

아름답고 눈물겨운 풍경 속에 푹 잠기는 것만으로 충만하겠지만 


이것 좀 봐! 하고 호들갑스레 나눌 가족과 친구가 없으면

와 - 하고 멍해지는 눈길 주고 받을 사람이 없으면 


으흠..

고독은 다루기 마련이라고 젠 체하다가 결국 외로움을 못 이기고 무너지겠고만. 

하버브릿지 아래 새 해의 불꽃놀이가 터지던 순간 가장 벅차고 외로웠던 것처럼. 


혼자 감탄해 부풀었던 가슴을 

혼자 찔러 중얼중얼 김빼고 있자니

운전하던 장군이 피식 웃는다. 

흠흠. 헛기침을 하고 다시 창밖을 보았다.

아직 마주보고 낄낄댈만큼 다시 친해지지 않았다구.


그나저나,

어제 본 '프레셔스'가 머릿속을 맴맴 돌고 있다. 


세상의 부조리함이라던가

선과 악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한 사람을 버텨주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다.


내 세계에 누군가 들어올 수 있도록

누군가의 세계를 내 세계로 받을 수 있도록

그러다 그의 지옥이 내게 번져온다 해도 물러서지 않는 것이 인간의 의리다.


뉴질랜드에선 곧잘


시간이라던가

사람이라던가 하는 

혹은 그 사이의 어떤 것,

아마도 영원하리라 예상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저 '좋다'고 하기에는 아까운 이 곳의 풍경엔

어디 한 군데 세월이 스미지 않은 곳이 없기 때문이리라 생각한다.


함부로 베이거나 파이거나 긁히지 않고 차곡차곡 쌓인 

폭포의 시간, 평원의 시간, 호수의 시간, 시간들.


- 빙하를 보러 가자! 


고 했을 때에도 나는 그 '시간'이 어떤 모습일까 궁금했다.


일만년간 꽁꽁 얼어붙은 얼음산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차갑고 단단할까 혹은 따뜻하고 부드러울까 궁금했었다. 


빙하로 다가갈수록 여기는 몇 년도. 다시 여기는 몇 년도. 

한 해에 70센티미터씩 녹아 사라지는 빙하를 안타까워 하는 사람들이 

아주 옛날엔 빙하였지만 더 이상은 아닌 푸석푸석한 곳곳에 푯말을 세워 어느 시간을 기억하려 한다.

그렇다 한들 한 번 사라진 빙하를, 흘러간 시간을 다시 되돌릴 수는 없는 노릇.


그리고 곧 멀리서부터 모습을 보인 빙하는

오기만 해라 꽁꽁 얼려 주마! 하는 무시무시한 살기는 없이

한뼘씩 녹아 사라진 그 시절, 그 피부 아래 꽁꽁 숨겼던 속살을 내놓고 있다.

내 눈 앞의 저 속살은, 천 년 전의 것일까 이천 년 전의 것일까.


뒤돌아보니 

폭포가 떨어져 무지개가 반짝이는 산등성이 저 쪽 너머의 절벽에

가슴에 손을 포갠 채 숨어버린 긴 머리의 아름다운 여인이 있다. 

견우를 그리는 직녀라던가 로미오를 따라 목숨을 버린 줄리엣처럼

사랑했으나 가슴에만 묻어야 했던 누군가를 바라보듯이.


으흠.. 빙하가 하얗다 못해 푸르게 질려 버린 것도

그녀로부터 줄곧 멀어지기만 하는 안타까움 때문인지도. 


백 년쯤 후에 이 빙하가 다 사라져버리면

그러면 벼랑에 서 있던 저 여인도

사라지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