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다시 와나카(Wanaka), 기회는 한 번뿐?
[2011.03.25]
프란츠조셉에서 와나카 호수로 돌아오는 길, 와나카와 마주보고 선 하웨아(Hawea) 호숫가에 차를 세웠다.
와나카에서 출발한 길에도 호수는 눈에 띄었을 텐데, 같은 풍경이 전과는 비교되지 않게 아름답다.
이젠 화해했으니 햇살이 눈에 반사되는 걸까. 전엔 싸움 끝이라 분해서 눈이 부얘졌을까. 아니면,
원하는 것을 향해 달려가는 순간이라 세상이 반짝반짝한가!
뉴질랜드 도착한 새벽에 공항 노숙을 한 뒤부터 나는 몹시 와인을 마시고 싶었다. 그것도 꼭 집어 '말벡'이었다. 와인이, 그것도 특정한 어떤 종류가 생각난 일이 없는데 희한했다. 딱 한 번 마셔본 그 묵직하고 텁텁한 와인이, 강렬해서 기억에 남았던 것일까.
사람들과 만날 일이 많았던 회사 생활이었으므로 간혹 와인을 마실 일이 있었고, 선물을 받기도 했고, 그러다 보니 좋아하는 와인이 생기기도 했다. 그러나 구태여 시간들여 와인 공부를 한다거나 내 돈을 들여 사 마실 만큼 애호하지는 않았다. 선물 받은 그대로 뚜껑 한 번 못 열려본 채 뜨거운 베란다에서 장렬히 산화한 와인만 몇 병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한여름 땡볕 아래 냉수만큼이나 와인이 절실했다. 이런 이상 징후가 보일 때면 나는 늘 말했다.
- 임신이다!
임신은 질병이 아니야 인간아, 하는 답이 늘 돌아왔다. 그러나 이 기묘한 증상을 대하곤 그도 평소와 반응이 다르다. 정말 임신인가? 임신이라면 먹고 싶은 걸 먹어야 할 텐데, 하필 그게 술인 경우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그냥 사 마시면 될 걸 유난을 떠는 건, 크라이스트처치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술을 사지 않기로 다짐했기 때문이다. 호주 여행 경비를 정산하고 경비의 25%가 술값이었다는 것을 확인한 후였다. 한 달 전 지진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크라이스트처치에 경비를 줄여 성금을 보내리라 호언장담-늘 장담이 문제다-했었다. 아무리 보아도 여유 없는 예산에서 줄일 수 있는 건 식비였고, 그러려면 술을 끊어야 했다.
그런데,
난데 없이 왜.
아아 대체 왜 와인이!
두 번이나 식사 중 옆테이블에 와인 구걸을 하려는 나를 제어하며, 장군은 프란츠조셉을 거쳐 와나카에 다시 올 때까지 와인욕이 사그라지지 않으면 그 땐 사자, 약속했었다. 찰나의 충동이라 생각했겠지. 그러나 사그라지기는 커녕 와나카 시내에 들어서자마자 더욱 기세등등해진 욕구를 달래려, 뉴질랜드에서의 가장 행복하고 들뜬 기분으로 마트로 내달렸다.
아, 그런데 아쉽게도 말벡은 없다. 아마도 뉴질랜드에선 말벡을 키우지 않는 모양이었다. 고심하던 우리를 보던 한 키위 아저씨가, 남섬에선 피노누아지! 하고 몇 병의 와인을 권했다. 그런데 피노누아는... 음, 다른 품종보다 비쌌다.
그게 패착이었다. 어차피 지르는 거 마음을 단단히 먹고 최선을 선택했어야 했는데, 어차피 꼭 집어 원하는 게 없을 바에야 '비용 대비'를 생각하겠다는 어설프고도 한결같지 않은 마음이, 악수를 두게 했다. 애비네 잇세(신의 물방울엔 토미네 잇세라는 와인 천재가 등장한다)라도 된 듯 뉴질랜드에서 키우고 빚은, '가격 적당한', 와인을 찾겠다는 일념으로 셀러를 샅샅이 살피며 장고 끝에 집어든 와인은 ... 메를로였다.
와인 한 병, 아니, 술 한 병에 이렇게 가슴이 뛴 적이 있었나. 앞으로는 있을까.
고기를 썰어 넣은 파스타를 한 솥 준비해 호수가 보이는 숙소의 테이블에 차리고, 두근두근 가슴을 부여잡은 내 앞에서 장군이 와인을 땄다. 그리고 글래스에 가득 부었다. 어라.. 색깔이 좀 연하다. 마시기도 전에 부정타게! 하고 생각을 다잡으며, 슬로우 모션으로, 아주아주 천천히, 한 모금을 머금었다. 그리고 와인을 삼키자,
아아...
목을 지나 가슴을 타고 내려간 관능적인 와인을 따라 플로랄 부케 향이 온 몸을 휘감았다.
이 곳은 노랗고 붉은 꽃이 만개한, 흐드러진 꽃잎이 부드러운 바람에 흩날리는 들판 한 가운데다.
라고, 진짜 잇세라면, 진짜 그렇게 말했을까.
이건.. 싸구려도 싸구려도 이런 싸구려가 없었다. 술 맛이 실망스럽다고 눈물이 날 것 같은 이상호르몬 상태를 보니 정말 임신인가 싶을 만큼 마음이 싸해졌다. 확 날아가버리는 새콤달콤한 알콜 기운 끝에 아주 약간 남는 포도향. 이럴 거면 화이트와인을 마시지 뭐하러 레드를 마셔 싶은 형편없는 맛이었다. 무지한 우리가 메를로가 과일향이 풍부한 소위 '화사한' 와인 축에 든다는 걸, 말벡과는 다소 반대편에 있는 와인이라는 걸 알 리가 없었다. 거기에 멋진 메를로도 아닌 게 분명했다. 이걸 마시고 알콜의 유해 성분을 감내하는 게 싫을 지경이다.
장군이 단호히 말했다. 부아가 난 내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삼분의 일쯤 남은 와인을 'Free food' 박스에 처넣으려 하자, 그는 모두 마시라며 그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안 돼. 마음먹고 한 큰 지출인 거 알지? 안 돼. 나는 투덜투덜대며 물마시듯 와인을 마셔치웠다. 제기랄, 입만 버렸어, 하고 궁시렁궁시렁 와인의 잡맛같은 잡말들을 주워섬기며.
다음 날이었다.
마트에 갔는데, 한 쪽에 카트 가득 병맥주를 종류별로 쌓아 놓고 1.5달러에 팔고 있었다. 물 한 병만 사면 되는 날이었다. 그런데 마트를 두 바퀴째 비잉빙 돌았다. 왜 도는지 너도 알고 나도 알고 누가 먼저 말하느냐가 문제라는 것도 너도 알고 나도 알았다.
- ..여기까지 와서... 뉴질랜드 맥주를 안 마셔볼 수가 없잖아!
- 그렇지. 와인한테 기회를 한 번 줬잖아. 그러니까 맥주한테도 기회를 줘야 공평한 거야!
결국, 뉴질랜드 산 웨카 두 병과 하이네켄 한 병을 들고 어제와 같은 자리에 앉았다.
오늘은 압도적인 하이네켄의 승리다. 아아, 이 크리스피(crispy)함이란.
- 대체 크리스피하다는 게 뭐야?
- 나도 몰라. 그렇다고 바삭바삭하다고 번역할 수는 없잖아.
- 그니까. 그런데 하이네켄을 마시면 느껴져. 이게 바로 크리스피함이로군.
- 그렇지? 그게 나도 그렇다니까. 하이네켄은 크리스피해.
오랜만의 의견 일치.
뉴질랜드에 오면서 달라진 게 있다면,
농장에서 일한 이래 지난 두 달간 매일같이 마신 술을 딱 끊은 것 뿐이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토록 지겹게 세차게 싸웠던 건, 앞으로에 대한 불안이라던가 둘이어도 해결 안 되는 각자의 고독을 소화하느라 아등바등한다던가 하는 내면의 뭐시기가 아니라 그냥 알콜 금단 현상이었던 것 뿐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마 장군도 그렇게 생각할 거다.
만족스러운 술, 한 병 밖에 안 사서 한 모금씩밖에 나눠마시지 못한 하이네켄이 지난 몇 일의 피로를 완전히 풀어주었다.
거칠고 모난 두 인간의 동행을 부드럽게 해 주는 윤활유였다. 연인도 아닌데 잃었다 찾으니 그 소중함을 알게 되었네. 알콜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