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밀포드 트랙(Milford Track),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
[2011.03.30 - 04.02]
1일차, 글레이드 선착장(Glad Wharf)에서 클린턴 산장(Clinton Hut)까지 5km
트래킹의 시작인 글레이드 선착장으로 향하는 이십분 남짓, 보트 안의 화제는 내내 '샌드플라이'였다. 남미에서는 '삐융'이라는 더 무시무시한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는, 악명 높은 흡혈 날파리 샌드플라이.
몇 일 전의 일이었다. 와나카 호수에서 프란츠 조셉 빙하로 가던 중, 도로 왼쪽으로 펼쳐지는 바다를 그냥 지나치기 아까워 해변으로 차를 몰고 들어갔다. 해수욕하기 다소 쌀쌀한 날씨이기는 했지만, 기괴할만큼 사람의 흔적이 없는 하얀 백사장이 끝없이 펼쳐진 근사한 곳이었다. 어떻게 아무도 이런 데를 모를 수가 있을까. 파도에 떠밀려 와 마른 듯한 썩은 통나무에 나란히 앉아 샌드위치를 들었다. 그런데,
- 앗, 따거!
장군이 손을 목에 대며 외쳤다. 왜? 하고 묻자마자, 앗, 할 만한 통증이 손에서 느껴졌다. 곧 이마에서, 얇은 바지 속 다리에서, 발에서, 몸의 이 곳 저 곳에서 익숙치 않은 통증이 잇따랐다. 날파리처럼 윙윙거렸던 벌레떼가 범인이었다. 물린 자리가 곧 벌겋게 일어났다. 얼굴을 마주하며 벼락같이 깨달았다. 이게 바로 샌드플라이다! 혼비백산 차 안으로 몸을 피했다. 차 문을 닫고 유리창을 끝까지 올리자 마치 불빛을 만난 날벌레들처럼 녀석들이 창에 달라붙었다. 당황한 채 무리해서 엑셀을 밟다가, 그만 모래밭에 바퀴가 빠져버렸다. 빠져 나가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차는 조금씩 가라앉았다. 입이 바짝바짝 마르고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던 그 모래밭에서 만난, 모래처럼 작은 날파리 샌드플라이.
- 가장 좋은 방법은,
사공의 말에 모두가 귀를 쫑긋 세웠다.
- 그냥 멸종되어가는 생물 하나를 먹인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배부르게 먹도록 협조하고 빨리 보내는 게 상책이라는 뜻이군요. 하고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트래커들에게 샌드플라이는 공포의 대상이다. 샌드플라이는 너무 작아 잡기가 거의 불가능하고, 몸에 뿌리는 퇴치제나 모기장으로도 완벽히 막을 수가 없다. 모기보다 훨씬 따갑고 가려운데다, 심한 경우 진물과 상처가 오래 남는다. 밀포드 트랙의 마지막 지점 이름이 '샌드플라이 포인트'일 만큼, 이 트랙엔 샌드플라이가 많다고 소문이 났다. 그러니 사공은 결국 '풍경의 일부라 생각하고', '밀포드 트랙엔 샌드플라이가 포함' 이라 여기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라 했다. 그나마 한여름을 막 지나 선선해진 날씨가 다행이다. 긴 소매 긴 바지를 입고, 겉으로 드러나는 부위는 레플란트를 잘 뿌려야지. 그러나 한 번 만나본 나는 그것들이 무섭다. 선착장 옆의 황폐한 모래밭 풍경이 샌드플라이 서식지처럼 느껴진다. 부르르.
한 사람 두 사람 채비를 하고 길을 나서기 시작했다. 오늘부터 나흘동안 같은 길을 걷고 같은 산장에서 지낼 일행들이다. 예수처럼 긴 웨이브머리와 수염을 휘날리는 이스라엘 남자는 다른 이들이 자신을 바라볼 거라는 시선을 꽤 의식하는 스타일이다. 내리자마자 아무와도 이야기하지 않고 휑하니 혼자 먼저 길을 떠난 한 영국 여자도 눈에 띄었다. 작은 배낭을 하나씩 매고 손을 꼭 잡고 오신 일본인 할아버지 할머니는, 어째서 보통의 연세 드신 분들처럼 좋은 산장에서 묵고 세 끼 식사가 제공되는 '가이드 트래킹'을 이용하시지 않고 더 힘든 쪽을 택하셨을까. 먼저 갈게요! 하고, 나선 한국인 청년도 있다. 티아노에서 우리와 같은 방을 썼던 홍콩 친구 첸은 기다리단 여자 친구와 함께 출발했다.
밀포드 트랙(Milford Track)은 뉴질랜드에서 가장 아름답기로 이름난 길이다. 겨울을 제외한 계절에만 트래킹 길을 열고, 나흘간 걷는 한 가지 코스로만 걸을 수 있다. 가이드를 동반한 등반객 50명, 개별 등반객 40명이 트랙에 들이는 하루 최대 인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몇 달 전부터 이 길을 걸으려 예약을 한다. 우리가 출발한 3월 30일은, 지난 12월 호주에서 신청할 당시 자리가 남은 가장 이른 날짜였다.
숲은 늘 상쾌하다. 나무들도 숨을 쉬고, 그 숨은 인간들의 것과 달리 뺨에 닿을수록 상쾌하다. 바람에 사르륵 소리를 내는 나뭇잎들은 따가운 볕은 가리고 부드러운 햇살은 총총 뿌릴 줄 알았다. 아주 오래 전에 본 <흐르는 강물처럼>이라는 영화의 아름다운 풍경이 떠오르는 길이 이어졌다. 모든 것이 완벽하다, 다만, 이 순간에도 내 머릿속을 차지한 '빌리'만 치울 수 있다면, 안팎으로 모든 것이 완전해질 텐데.
티아노 시내에 단 하나 있는 캠핑장비 대여점의 문이, 하필 우리가 출발하는 아침에 '외출' 딱지를 달고 닫혀 있었다. 덕분에 트래킹 내내 요리에 쓸 작은 냄비 '빌리'가 없다. 사흘 내내 기분좋게 트래킹을 마친 저녁마다, 누가 우리에게 냄비를 빌려줄까 눈치 보며 남들 밥 먹는 동안 기다려야 하겠지 생각하니, 울적했다. 마치, 아침부터의 걸음이 결국 우리를 기다리는 매일의 어두컴컴한 구석으로 향하는 것만 같았다.
부르르, 고개를 저어 생각을 떨쳐냈다. 실은 오늘도 이미 마음씨 좋은 영국 아주머니가 우리 이야기를 듣곤 자기 냄비를 쓰라고 하셨잖아.
아름다운 풍경으로부터 나를 완전히 가리는 데는 대단한 완력이 필요하지 않다. 이를 테면, 공교롭게도 마침 그 시간 배탈난 대여점 주인이 한 이십 분 자리를 비운다던가, 눈 앞에 한 줌의 샌드플라이가 뿌려진다던가 하는 작은 방해라면, 몸과 마음을 열어도 다 담지 못할 이 나흘어치의 아름다운 풍경 앞에서도 머리와 가슴은 죽은 듯이 멈춘다.
눈 앞의 티가 모두를 망쳐버리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결국 내 몫이다.
걸음을 떼는 게 아까운 이 길이 이토록 아름다운 걸.
2일차, 클린턴 산장(Clinton Hut)에서 민타로 산장(Mintaro Hut)까지 16.5km
간밤엔 있는 옷을 다 껴입고 뜨거운 찻잔을 들고도 덜덜 떨 만큼 추웠다.
내일 도착할 가장 높은 지점은 언제나 눈이 쌓여 있다는데, 귀마개를 꺼내고 중무장을 해야겠다.
#.
오늘도 아름다운 길이다.
바보같이 같은 말을 계속 반복했다.
아름답다, 아름답다, 와아, 아름답다.
그리고 어느 순간,
아, 저 사람이 빛으로 들어가는구나, 하고 멈춰섰다.
저 앞의 나무 사이를 지나는 장군을, 빛이 부드럽게 감싸는 듯 보인 한 순간.
같이 걷는 기쁨을 느끼고 있다.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때로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나란히 손을 잡고, 거리를 두고 홀로 또 함께 걷는 편안한 호흡.
같은 시간에 같은 길을 다른 사람 아닌 너와 함께 걷고 있다는 데서 오는 안도감.
먼저 가고, 기다리고, 함께 걷고, 또 먼저 가고, 다시 만나는 리듬.
예민하고 날카로웠던 그 간의 마음이 누그러진다.
#.
비가 무섭게 쏟아졌다.
그럴 거란 말을 듣고 이른 아침에 출발한 덕에 다행히 비가 쏟아지기 직전 산장에 도착했다.
한 사람 두 사람, 비를 쫄딱 맞고 어깨 위로 모락모락 김을 풍기며 산장에 들어섰다.
그런데 일본인 할아버지 할머니 부부가 나타나지 않았다. 다른 모든 이들이 들어올 때까지.
어쩐지 불안해서 장군과 나가 보아야 하나 걱정하는 찰나에.. 창 너머 멀리 두 분의 모습이 나타났다.
손을 꼬옥 잡고, 빗속을 헤치고 오신다.
왜인지 모르겠으나
아까 장군이 빛으로 들어간다, 했던 순간과 오버랩되며
어쩐지 눈물이 왈칵 날 것 같았다.
기다렸어요. 정말 걱정했어요. 하고, 문 앞으로 달려가 할머니 손을 부여잡았다.
영어를 못하시니 말을 못 알아들으셨대도, 우리 표정과 몸짓으로 마음을 알아들으신 것 같았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고마워요, 하며 우리를 오히려 토닥토닥하셨다. 별 것 아닌 따뜻한 물 한 잔을 몹시 고마워하시면서.
할아버지가 꼼꼼히 할머니의 물기를 털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추울세라 얼른 가스렌지 하나를 잡고 따뜻한 물을 데우셨다.
3일차, 민타로 산장(Mintaro Hut)에서 덤플링 산장(Dumpling Hut)까지 14km
시작하자마자 두 시간 정도의 가파른 오르막이 이어졌다. 그래도 아침이라 개운하게 오를 수 있었다.
물이 얼고 서리가 낄 만큼 차가웠지만, 어제와 달리 맑은 날이라, 머리에서 쨍 소리가 나는 기분 좋은 아침이었다.
- .. 그래서, 캠핑할 때 아빠는 주로 맛있고 멋있고 힘 덜 드는 일을 하셨어. 고기 굽는 일이라던가.
- 밥은?
- 밥이나 찌개 같은 자질구레한 요리는 엄마가 다 하셨지.
- 우리는 아빠가 다 하셨어. 말했잖아, 텐트 치고, 밥하고, 찌개하고,
- 맞아 아버님 찌개,
- 응 찌개는 꼭 끓이셨지. 아버지 찌개 좋아해. 그리고 고기 굽고 설겆이하는 것까지 모조리 다 아버지가 하셨어, 집 나오면 남자가 하는 거라고. 엄마는 쭉 앉아 계셨어.
- 그럼 너는 그런 아빠가 되겠구나. 훌륭하다.
- 내 말은, 그러니까 어린 마음에 아빠가 그렇게 힘들어 보일 수가 없더라구.. 아, 아빠란 참 힘든 거구나, 나는 나중에 그러지 말아야겠..
- 하게 될 거야.
- 아, 아버지는 참 힘드시겠구나. 아버지의 은혜란 가이 없는 거로구나..
- 우리 둘을 생각해 봐라? 나는 평강이야. 지혜롭고 예쁜 여자지. 그럼 너는, 자동으로,
- 아 그래그래, 그럼 나는, 공주할래!
- 뭐? -_-
- 너는 평강, 나는 공주, 우리는, 평가앙 공주!!
장군이 내 손을 잡고 자신의 팔과 크로스했다.
걷다 말고 배를 잡고 웃었다. 이런 바보들..
산행의 마지막 밤이라고 생각하니 잠이 오지 않는다.
내일도 18킬로미터를 걸어야 하는데.
4일차, 덤플링 산장(Dumpling Hut)에서 샌드플라이 포인트(Sandfly Point)까지18km
가능한 천천히 마지막 길을 즐기자며 일행 중 가장 늦은 아침에 산장을 나섰다.
그리고 많이 쉬고, 아주 아주 느리게, 느리게, 걸었다.
내가 카메라를 떨어뜨려 액정이 나가버렸다.
낮은 데서 손이 미끄러졌는데 운나쁘게 돌부리에 액정이 부딪쳤다.
그런데 둘 다 놀랍도록 담담했다. 몇 일 전이었다면 화내고, 그럼 더 큰 화로 받고, 그렇게 싸울 일이었는데.
다만, 부디 큰 돈 들지 않고 고칠 수 있었음 좋겠다.. 하고 넘어갔다.
나흘이 무척 빨리 흘러갔다.
아침 일찍 일어나 걷고, 먹고, 자는 단순한 하루가 좋았다.
융단 같은 아늑한 길, 물기 머금은 산 속의 깨끗하고 시원한 공기, 불순물이라고는 한 번도 닿은 없는 듯한 맑은 물을 오래오래 즐겼다.
아름다운 풍경은 그 자체로 사람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힘이 있다.
그리고 따뜻한 아랫 동네로 넘어 오니, 역시나, 샌드플라이가 무척 많고,
모두 신바람이 나 있다!
-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여러분이 마지막이예요. 환영합니다.
샌드플라이 포인트에서 우리를 기다리던 보트의 사공이 말했다.
네,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어쩐지 산행 전과는 조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