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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New Zealand, '11.03-04)

01. 크라이스트처치(Christchurch), 빈 공간

[2011년 3월 16일]

지진이 일어난 지 한 달, 도시는 차분히 평정을 되찾고 있는 듯 보인다.

크라이스트처치에 도착했다. 
이 곳을 시작으로 뉴질랜드 남섬(South Island)에 세 주간 머물기로 했다.
원래의 계획에는 없던 여정이고, 우리들은 뜻밖에 주어진 이 시간을, 
다시 긴 여정에 들어가기 전 호흡을 가다듬는 준비 운동처럼 여기기로 했다. 

몇 번의 크고 작은 트랙킹을 생각했을 뿐 꼭 해야 할 일이나 만나야 할 사람도 없고
빌린 차에 짐을 싣고 마음대로 움직이면 되니 몸이 고생스러울 것도
생각이나 감정을 흔드는 별다른 사건이 일어날 것도 없는
아마도 아주, 조용하리라 예상되는 여행이다.

그런데 막상
사방이 하얀 방과 같은 이 텅 빈 공간 앞에 서자 나는 바보가 되었다.

자꾸 집 생각이 났다.
머리가 자주, 몹시 무거웠다.
일없이 폭폭해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별 것 아닌 장군의 말이 꼴보기 싫어 으르렁댔다.

WE WILL TRY TO SAVE THIS HOUSE




자전거를 타고 무너진 도시의 바깥을 돌던 중이었다.
몇 개의 긴 나무로 간신히 버텨 놓은 한 집 앞에 멈춰 섰다.
글자들 사이로 보이는 가는 막대기들이 있는 힘껏 소리쳤다.
버텨라. 버티는 거다. 모두들 이렇게 애쓰고 있다. 할 수 있어. 버텨라.

문득 케언즈에서 처음 다이빙하던 날 생각이 났다.
무거운 장비를 짊어지고 바다로 뛰어든 순간이었다.

생각보다 몸을 가누기가 퍽 어려웠다.
제법 높은 파도에 곧 삼켜질 것만 같았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차례를 잊은 것처럼,
등에 맨 산소 대신 계속 물을 들이켜는 기분이었다.
숨을 고르지 못하니 귀에 느껴지는 압력은 더 세졌다.
불안하고 불규칙하게 두려움을 토로하는 숨소리만 귀를 가득 채웠다.

호흡이 불규칙할수록 몸은 파도에 휘말렸다.
그럴수록 몸은 본능적으로 물 밖을 향해 버둥댔다.
그러나 강사는 팔을 꽉 잡고 놔주지 않았다.

괜찮아요, 견디세요. 숨을 들이마셔요, 좋아요, 이제 내쉬어요. 잘했어요, 그거예요.
 
다른 이들이 모두 내려갈 때까지 그 자리에 멈췄다.

스스로 숨을 고를 때까지,
머리를 누르는 기압에 적응할 때까지,
무엇보다 그 모든 발버둥을 일으키는 바보 같은 두려움을 떨칠 때까지.

고막을 가득 채운 숨소리가 조금씩 안정을 찾았다.
무섭게 가슴을 두드려대던 심장도 흥분을 가라앉혔다.
조금씩 조금씩 아래로 향했다.

곧 더 이상 파도가 닿지 않는 바다가 나타났다.
고요하고 부드러운 바다, 엄마 품처럼 따뜻하게 몸을 감던 바다.
마치 쭉 눈을 감고 내려온 듯 이전과 다른 세계가 그제사 눈 앞에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이 빈 공간 앞에서 다시 버둥댄다. 아마도,
이 공간을 우리들의 좁은 생각대로 다루어 보려는
어떻게든 무언가를 채우려는 강박적인 호흡 때문이리라.

그러나 다시금,
지금이 고요히 숨을 고르고
몸의 힘을 풀어야 할 때임을 깨닫는다.

설사 내내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해도
그저 비인 채 가만히 머무르며 만족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우리들에겐
한계치의 자극이 빗발치는 어떤 때보다 고요히 머무는 시간이 더 어렵다.
그러나 어쩌면 삶을 삶으로 지탱하는 것은 이런 빈 공간인지도 모른다.
세심히 서로를 잘 보듬어 버텨야 하는 순간 역시 이런 때이리라. 

우리들 스스로 숨을 고를 수 있을 때까지. 
들이마시고 내쉬는 리듬을 터득할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