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놀이 후 집에 한 시 반에 돌아왔으나, 다음 날 예정대로 블루마운틴에 가기로 했습니다. 새 해에는 시드니 머무는 동안 토요일마다 부지런히 놀러 다니는 것이 우리들의 목표! 저는 뜨끈한 와인이 좋지 않았는지 머리가 아파 샤워하자마자 바로 침대에 누웠는데, 장군은 친구들과 밤이 맟도록 스카이프로 통화를 하는 모양입니다. 네, 그래도 갑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냉장고 재료들로 김밥 도시락을 싸고 먹을 것을 잔뜩 챙겨 집을 나섰습니다. 블루마운틴 근처 카툼바(Katoomba) 역까지는 집에서 기차로 꼭 두 시간이 걸립니다. 출퇴근 시간이 아니면 기차 요금이 30% 할인되는데, 휴일도 여기 해당됩니다. 앗싸. 게다가 매일 출퇴근하는 시내까지 고작 홍대에서 을지로 정도 거리인 8km 의 할인된 차비가 5.4달러인 것에 비하면 카툼바까지 10.8달러는 의외의 가격이었어요.
오래된 시골 기차 같은 시외행 열차를 처음 타 보았습니다. 플랫폼에서 열차의 문도 승객이 직접 드르륵 열고 타야 합니다. 객차는 아늑했지만 등받이가 앞뒤로 조절된다거나 하는 고도의 기술은 적용되지 않았지요. 장거리 열차라 객차 안에 작은 화장실도 있었고요.
아침 여덟시 반, 기차에 우리 밖에 없음!
잘 자는 우리 장군, 좀 짧은 우리 장군
카툼바 역에 도착했습니다. 정말 작은 시골 간이역이었어요. 그나저나 카툼바는 무슨 뜻일까요? 울룰루, 울루물루, 우이우이 등 옛 이름을 간직한 동네를 볼 때면, 우리가 사는 애쉬필드는 원래 뭐라고 불렸을까, 시드니는 멜번은 어떤 이름이었을까 궁금합니다. 호주는, 좀처럼 애보리진을 만나기 힘든 애보리진의 땅이니까요. 당당히 공존하지 못하고 사실상 빼앗긴 땅에서 그네들은 무엇을 느끼고 어떤 생각을 물려주며 살고 있을까요.
역부터 블루마운틴 전망대이자 트래킹 시작 지점인 에코 포인트(Echo Point)까지는 걸어서 십오분 정도의 거리, 한산하고 예쁜 동네길을 걷는 것도 즐거웠어요. 그러다보면 와! 하고 외칠 만큼 멋진 풍경이 펼쳐집니다.
유칼립투스 분출물이 햇빛에 반사되어 나타나는 푸른 빛 때문에 이 산의 이름이 블루마운틴(Blue Mountain)인데, 사실 듣던만큼 신비롭도록 파란지는 실감하지 못했어요. 장군도, 원래 저렇게 먼 산은 다 파래 보이는 거 아니야? 합니다. 그보다는 끝도 없이 펼쳐진 산에 압도 당했습니다. 호주는 거의 하나의 대륙을 차지한 큰 땅이라 그런 걸까요, 산도 높기보다 넓다는 느낌을 줍니다.
왼쪽으로 보이는 바위는 '세 자매 바위 the Three Sisters'라고 해요. 먼 옛날 이 지역의 부족장에게 아름다운 세 딸이 있었는데, 원수 지간인 이웃 마을 족장의 세 아들과 사랑에 빠졌답니다. 이 금지된 사랑 때문에 두 마을 간에 전쟁이 일어났대요. 부족장이자 주술사였던 아버지는 세 딸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전쟁통에서 보호하기 위해 잠시 바위로 변신시킵니다. 싸움이 끝나면 다시 되돌릴 생각이었지요. 그러나 애석하게도 유일한 주술사인 그가 전사합니다. 그래서 딸들은 영원히 바위가 되어 버렸어요.
전설을 듣고 아... 하다가 풋, 웃음이 나기는 처음이었습니다. 흠흠. 어쩐지 바위에 서린 기운이 '비운의 사랑'이기보다는 '당황'일 것 같았어요. 세 자매가 이렇게 말할 것만 같더라고요 - "응? 못 나가는 거야? 나 갇힌 거야? 방법 없는 거야? 언니, 끝난 거야?" - 한 번 초점이 엇나간 머리는 계속 딴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세 자매 세 형제는 순서대로 짝 맞춰 사랑했을까, 아니면 족보 엉키게 연상 연하가 섞였을까.
이 날은 일본인, 중국인 단체관광팀이 있어 에코 포인트가 잠시 시끌시끌했습니다. 그러나 모두 순식간에 사진 찍고 휘리릭 사라졌고, 막상 산 속으로 들어가니 사람이 없어 조용했어요. 하여, 본격적인 오늘의 트래킹 시작!
세 자매 트랙입니다. 세 자매 바위 옆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 산허리를 도는 2.5km.
세 자매 바위 아래 점심. 장군의 헤어밴드가 예뻐 나도 해 달라 했으나 방금 배달온 스시집 스탭이 됐.. (..)
세 자매 바위 아래 긴 계단(Great Stairway)의 시작점엔 <Hard Walker>만 가라는 권고 표지판이 있습니다. 가파르고 길어서 다 내려가곤 다리가 후들후들했지요.
호주 사람들은 숲 속을 걷는 것을 부시 워킹(Bush Walking)이라고 하는데, 이 코스는 가파른 계단도 있고 오르막도 있어 그렇게 가벼운 산책로는 아니었어요. 제법 땀도 나는 가벼운 트래킹 코스라 할 만한 곳이었지요. 막상 산을 걷다 보니 먼 산세는 보이지 않고 가까운 풍경은 우리나라 산들과 비슷한 느낌이라 외국이라는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처럼 산 속에 들어가면 드는 탁 트이는 느낌, 숨이 시원해지는 느낌이 덜했습니다. 그 날의 날씨가 너무 뜨거워 그랬을까요, 서울처럼 산 밖의 공기가 탁하지 않아 산 안과 밖의 대비가 덜했던 걸까요.
중생대 대왕 고사리!
이 트래킹 코스의 끝은 시닉 월드(Scenic World)로 통합니다. 블루마운틴에는 옛날 탄광이 있었답니다. 언제나 이런 힘든 길을 닦는 것은 그런 분들의 몫이지요. 광부들이 일하던 갱도 입구, 쉬던 오두막 등 작은 탄광 마을을 재현해 놓고 한 시간 정도 거리의 산책로를 가꾸어 놓았어요.
광부들의 작은 오두막(Hut)
위의 장군이 찍던 광부들의 테이블
이 곳은 산 아랫쪽이라, 카툼바 마을이 있는 산 위까지는 석탄 운반 열차를 개조한 레일 웨이(Railway)와 보통의 케이블 카인 케이블 웨이(Cableway), 산 봉우리와 봉우리를 연결하는 스카이 웨이(Skyway)로 연결합니다. 여행사의 하루 패키지를 이용하면 에코 포인트에서 차를 타고 바로 이리로 온다고 해요. 산 아래까지는 레일 웨이, 케이블 웨이, 스카이 웨이 왕복으로 내려왔다가 올라갈 테고요.
저희도 올라갈 때에는 레일 웨이와 스카이 웨이를 이용했습니다. 레일 웨이는 올라갈 다른 길이 없어서, 스카이 웨이는 호기심에 시도해 보았는데 별로 훌륭하진 않았어요. 재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코스는 무척 짧고, 풍경은 에코 포인트에서 본 것만큼 수려하지 않았거든요.
스카이웨이에서 보이던 길고 가녀린 카툼바 폭포
하루를 꼭 채운 짧은 나들이를 마치고 집에 왔습니다. 애비는 매일 자전거 타고 출퇴근하니 오랜만의 운동도 아니건만, 어제 '땡볕 뻗치기'에 이은 강행군이라 그런지 몸이 꽤 뻐근했어요.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둘 다 혼곤하게 잠들었습니다. 놀이터에서 정신 놓고 놀고 들어와 땟국에 전 옷차림 그대로 쓰러져 잠들었을 때와 같은, 기분 좋은 피로였어요.
길 위에서 대부분의 날들을 보낼 올 해, 어떤 날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생각합니다. 이 날처럼, 발 딛은 그 곳에 완전하게 우리를 놓고, 돌아서선 어디서든 픽 쓰러져 잘 자고, 또 일어나 와구와구 밥 먹고 씩씩하게 길 가는 날들이었으면 합니다. 상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닥칠 테고, 힘이 들면 이게 무슨 짓인가 회의하겠지만, 다행히 혼자가 아니니까요. 블루마운틴 다녀온 날, 기대에 부푼 마음으로 새 해 첫 하루를 마쳤습니다. (네네. 억지스럽고 훈훈한 마무리라는 비난들이 귓가에 들리는군요.)
FOR ALL, HAPPY HAPPY NEW 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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